사도행전 17장에는 바울이 아덴(아테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덴은 철학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아덴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끌어갔던 두 개의 가르침이 있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였다(17:18).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가르쳤고, 삶의 모든 행위가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스토아 학파는 이성적이고, 지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가르쳤다. 금욕적이었고, 절제와 훈련을 중요하게 여겼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가르침을 바탕으로 생활했다 –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거나 절제하고 고상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놀라운 것은, “오늘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 “육체적인 쾌락을 얻고자 하는 삶(보이는 삶) + “절제하면서 좀더 고상한 생활을 하려는 삶”.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제3의 길을 가르쳤다 – 신앙의 삶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다. 그들에게는 시대에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으로 원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17:28)고 하였다. 예수님을 통해서 얻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삶을 그들에게 소개한 것이다. 신앙의 길에도 두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롬 6:11)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여기다” = ‘단순히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간주한다’가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간주한다, 여긴다, 인정한다”는 말이다 -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다”. 각각의 의미가 무엇인가?
1.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
예수님은 죄사함을 위해 희생제물로 죽으셨다. 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나도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다”라고 여길 때, 죄악된 행위를 버릴 수 있다.” 우리가 어디서(서울, 동경, 뉴욕, 런던, 파리), 누구에게(잘났거나 그렇지 않거나) 복음을 전할 때, 공통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섯 가지가 있다(빌리 그래함) – 심리적이든, 영적이든. ㄱ. 사회적 개선이나 물질적인 풍요만으로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본질적으로 “공허함”이 있다 – 로또에 당첨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ㄷ. 청중들은 고독하다 – 환자들의 가장 큰 문제 = “고독”(의사의 진단) = 파티장에서도 느낀다. ㄹ.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 “죄책감을 없앨 수만 있다면, 환자의 절반은 당장 돌려보낼 수 있다”. ㅁ.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두려움이 있다 – 모든 사람이 죽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이 5가지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 죄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2.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기라”.
내가 이미 나의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옛 삶은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삶이라고도 표현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간주할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갖는다. 눅 19장에 소개된 삭개오의 변화를 보자. 우선, 그를 묵상할 때마다 가지는 염려가 있다 - “예수님을 만나면, 나도 삭개오처럼 해야 하는가?” 아니다. 모든 소유 중에서 일부분을 가난한 자를 위해 뗀 것이지,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눅 19:8). 삭개오가 잃은 것이 무엇인가? 욕심, 물질적인 탐욕,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었다. 그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형제를 얻었고, 사랑하는 마음과 나누는 넉넉함을 얻었다. Key word(열쇠)는 예수님이다. 바울은 이렇게 간증한다 – “그는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7-28).” 여러분의 간증이 되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