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치유자 (사무엘상 22:1~2)

사람들은 자신의 창조적 잠재력(힘)과 파괴력을 동시에 깨닫고 있다.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파괴적인 요소도 함께 경험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 문제, 대기오염으로 인한 자외선 증가 (차량의 매연이 주범이다), 식량문제, 인구문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앞서 제기한 문제들보다는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더 큰 어려움과 위협을 느낀다. 동물들은 같은 종끼리는 싸우거나 죽이지 않는데 비해 사람만은 예외이다. 죽여도 잔인하게 죽인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솜씨가 묻어난다. "포이에마"는 그런 솜씨가 돋보인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만드신 바"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존재"로 변할 수 있는 이유는 죄 때문이다. 죄가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구약에서는 매년 드리는 희생제물이 이를 대신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를 놓쳐 버린 인물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었다. 사울은 원래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왕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초심을 잃게 되었다. 초심을 잊어버리니까, 교만해지고 권력을 남용하고 사사롭게 이용하게 되었다. 그가 왕으로써의 역할을 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세우신 하나님께는 아니었다.

대권을 가장 사사롭게 사용한 왕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사울은 권력을 이용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 사울의 생각에 동조하는 신하가 별로 없었다. 아마도 간신배 역할을 한 측근들은 동조했겠지만, 그 밖에 다른 신하들은 아니었다. 더구나 다윗은 사울의 사위였다. 제사장이었던 아히멜렉도 다윗을 공개적으로 두둔했다(삼상 22:14-15).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윗 편에 서 계신다"는 것이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가운데 일부분이다.

삼상 22:1.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두 가지로 살펴보자.

1. 상처 입은 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의 형제와 가족과 환란을 당한 자들, 빚진 자들,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다. 제대로인 측근이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다, 해피(happy)한 자가 아니었다. 억눌려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윗이야말로 “환란을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진다. 왜 다윗에게 그러한 사람들을 붙여 주었을까? 여기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의 모습을 본다. 다윗으로 하여금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상처 받은 사람들을 붙여 주신 것이다 - 하나님의 신비로운 방법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방식은, 상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치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다.

2. 관전 포인트는 "다윗의 대처방법"에 있다.

운동 경기마다에 관전 포인트가 있듯이, 오늘 읽은 본문에도 "관전 포인트"가 있다. 그것은 다윗이 왜 '맞대응'하지 않았는가"하는 점이다. 다윗도 사람을 모으려고 했다면, 사울 못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명분까지 다윗의 것이었다. 대권의 후계자라고도 할 수 있는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도 지지한다. 맞대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다윗은 수비로 일관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비록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시는 내용과 방법을 마음으로 몽땅 다 믿은 것이다. 관전 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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